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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영국 상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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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조회 463회 댓글 0건 작성일 20-07-2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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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에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ㅋㅋ.. 원래 탐라용 글이었으니까 이해하고 봐주세요.




영국에서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구성한 기구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원조차 세금, 기금 등 돈과 관련된 사안을 다룰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 191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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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게에 올라온 칼럼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정외과 교수가 세금을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라고 표현하다니 의외네 하면서 읽다가 ㅋㅋ 영국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이 눈에 밟혔어요.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의 뉘앙스는 칼럼에서 인용된 것과는 살짝 다르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부적절한 사례인용일지도 모르고요.

1909년 자유당 정부의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고민에 빠집니다. 커져가는 독일의 위협에 대항하여 더 많은 전함들을 건조할 예산이 필요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세제개혁을 동반해야했어요. 그러나 급진적인 세제 개혁은 당내 반대는 물론, 06년 선거에서는 참패했으나 여전히 의회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보수당의 비토를 뚫기 어려워 보였어요. 게다가 상원의 다수당은 보수당이었고요.  

이 때 데이비드와 그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꾀를 내어, 세제개혁을 빈곤과의 전쟁을 위한 예산이라고 소개했어요. 그래서 세제 개혁안 이름도 Peoples budget. 아주 거짓말은 아니에요. 어쨌든 전쟁을 위한 증액이긴 했으니까.

그 내용은 아주 급진적이어서, 부동산 가치의 20%나 되는 토지양도세의 신설, 고소득자 증세를 위한 증세구간 신설, 초고소득자에 대한 슈퍼 택스, 상속세 증세가 담겨있었어요. 이 개혁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되죠.

여기서 부결은 아주 의미있었어요. 상원은 언제나 법안과 조세계획안에 대해 반대할 전통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명예혁명 후, 현대적인 의회제가 시작된 이래 상원은 200년동안 예산안과 세금개혁안에 대해 반대를 하지 않았었어요. 그러다 19세기 중반, 신문세 철회에 최초로 거부권을 행사했죠. 그 이후 하원은 상원에 재정법(Financial bill)의 형태로 매년 예산과 세금 계획을 짜 보냈고 Peoples budget 이전까지 상원은 저 법안들을 부결시키지 않았죠. 이런 정치적 관례를 깨는 것에 상원도 부담을 느꼈고, 예산을 반대하면서도 다음 회기에 의결정족수 채워오면 통과시켜줄꺼임하며 조건을 달았죠.

사실, 이 상원에서의 부결은 자유당이 예상한 시나리오였어요. 오히려 이 법안을 부결시키길 바라며 전 당수였던 로즈베리경까지 출동해 사회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해 보수당과 상원을 자극했죠. 결국 이 부결을 동력으로 삼아 자유당은 총선거를 다시 한 번 실시해요. 민중을 위한 예산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보수당, 나아가 보수당의 보루인 상원을 무력화시킬 심산이었죠.

그런데 1910년 1월, Peoples budget을 의제로 의회를 해산한 뒤 다시 치른 총선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요. 자유당은 123석을 잃고, 보수당은 116석을 얻으며 두 당의 의석차는 2석으로 좁혀짐! 게다가 자유당은 단독과반을 얻는 데 실패해서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정을 하죠. 이 때 자유당은 아일랜드 의회당이 염원하던 상원 무력화와 아일랜드 자치권 확대를 약속하며 Peoples budget을 통과시켜요. 상원은 약속대로 두 번째로 올라온 법안을 통과시키고요.

자유당은 이걸 기회삼아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을 일으켜요. 예산안 통과와 상원 개혁안 사이에 돌았던 구호는 이런거였어요. 운좋게 뽑힌 일하지 않는 500명이 땀흘려 일하는 수 백만의 선택을 번복해도 되는 겁니까? 당시 자유당은 상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개혁안을 만들어 올리지만, 당연히 상원에서는 부결. 그리고 1910년 12월, 자유당은 상원 무력화를 위한 법안개정을 목표로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해요. 그러나, 놀랍게도 자유당은 2석을 잃고, 보수당은 1석을 잃으며 두 당의 의석차는 단 1석으로 줄어들죠. 당시 자유당 의원 중 누구 한 명이라도 뭐 사고가 나서 의정활동을 못하게 되면 제1당의 지위가 날라가버리는 상황 ㅋㅋ..

Peoples budget에서 부터 상원 개혁안까지 선거결과로 보면 ㅋㅋ.. 자유당이 하고자 하는 일에 그다지 국민적 지지가 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자유당은 상원 무력화는 국민의 뜻이라며 또 한 번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정을 하고 상원 개혁안을 밀어붙여요. 당시 자유당은 상원에서 법안이 부결되면 몇 번이고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할 꺼라고 엄포를 놨었는데. 국왕 조지 5세는 그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어요. 그는 상원개혁안을 다음 회기에 올리면 국왕의 권한으로 상원의 반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의원을 자유당을 위해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렇게 1910년 12월 선거에서 단 1석차로 이기고, 그나마도 과반의석이 아니라 연정을 해야했던 자유당은 어쨌든 국왕을 압박해 약속받은 대로 상원의석을 얻었고 상원개혁안을 실시해요. 상원의 법안 거부권은 대폭 축소되며, 법안 심사를 연기함으로서 법안을 우회적으로 비토하는 방법도 해당 회기 안에 처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명시됨. 이렇게 1911년, 현대적 의미의 영국 상원이 탄생함. 짝짝짝


자유당이 이렇게까지 무리하면서 상원개혁안을 밀어붙였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보수당을 끝장내기 위해서였어요. 간혹 총선에서 이기는 일이 있더라도 상원에서 정치적 동력을 쌓아 귀환해버리길 반복하는 상대는 너무 치사하잖아요?  그러나 상원 무력화 이후에 오히려 무너진 건 자유당이었죠. 상원개혁 후 불과 14년만에 자유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해버려요. 보수당의 적수라는 자리는 1900~1910년사이, 2석에서 40석으로 대약진한 노동당이 차지하죠.  그리고 이 때 데이비드 로이드와 함꼐 보수당 파멸을 계획했던 처칠은 24년 이후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겨 ㅋㅋ.. 영국 국부의 지위에 오름. ㅋㅋ... 처칠이 Peoples budget을 통과시키기 위해 했던 발언들을 살펴보면 거의 뭐 빨갱이 뺨쳐요. 주어진 토지로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놈들로 부터 분배를 이룩하고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야하지 않겠습니꽈~ ㅋㅋㅋㅋ 이 때는 시대정신이었던거임 ㅎㅎ


ㅋㅋㅋ... 그냥 칼럼에서 한 줄 읽고 말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결론은 우리나라의 부동산 증세를 비롯한 세금인상을 비판하기 위해 든 사례가 하필이면 ㅋㅋ 부동산 증세를 반대하다가 팔다리가 잘려버린 영국 상원의 이야기라서 좀 아이러니하다는 거였어요. 아 생각해보니까 그냥 대충 이 정도만 말하고 끝냈으면 되는 거였자너 ㅋㅋ...






p.s 다 쓰고 읽어보니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진짜 마냥 전함을 위해서 국민한테 사기쳐서 예산을 땡겨온 거 처럼 썼네요. 데이비드 장관은 원래부터가 부의 분배와 빈곤퇴치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다만 당시 최대의 고민이 전함건조비용 조달이었던 것.

이분을 웨스트민스터로

상원내 보수당의 반대를 뚫기 위한 문제의 돌파전략은 연준이 프린터로 달러 찍어내는 전략의 효시라고 할 수 있어요. 달러가 모자르면 달러 인쇄해서 대응하는 것처럼 상원에서 자유당 의원이 부족하면 그냥 왕이 나서서 자유당 의원을 찍어내면(!?) 되는 것 ㅋㅋㅋㅋㅋㅋㅋㅋ 연준의 발권력 = 왕의 의원생산력



"삼가 보건대, 요동의 자그마한 오랑캐가 엄한 형벌에 복종치 않아 멀리 6군의 군사가 출동하고 황제께서 직접 출동하시게끔 하였습니다. 다만 오랑캐들은 속임수를 잘 쓰는바, 이에 대해 잘 방비하여야만 하니, 그들이 입으로 항복한다고 말하더라도 성급하게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합니다. 지금 장맛비가 내리고 있으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제군(諸軍)을 엄하게 절제해서 성화같이 속히 진격하되, 수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해서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진격한다면, 외로운 평양성쯤은 곧바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의 근본 뿌리인 평양성이 넘어간다면 그 나머지 성들은 저절로 무너져 곧바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가을장마를 만날 경우에는 몹시 곤란할 것입니다. 군량은 다 떨어지고 강적인 고구려가 앞에 있고 말갈이 뒤에 있는데, 머뭇거리면서 결정짓지 못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  병부상서(정3품) 단문진

3월에 죽으면서 양제에게 저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딱딱 맞아들어가죠. 항복한다는 걸 믿지 마라, 시간을 끌면 안 된다... 하지만 양제는 둘 다 어겼죠.

수나라의 백십삼만대군, 이게 불가능한 수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중국, 그 수나라라도 엄청나게 무리한 수치는 맞죠. 거기다 오래오래 준비한 게 아니라 급히 준비한 전쟁입니다. 안 그래도 오랑캐 땅-_-인 요동에 가기도 힘든데, 보급을 제대로 하기는 훨씬 더 힘들었죠. 그나마 수군을 이용한 보급이 가능했지만 급히 배를 만든다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요동까지 가는 데도 이런 상황인데, 방어선을 무시하고 강공하는 상황에선 어떻겠습니까. 보급부대가 따라갈 수가 없죠. 이래서 나름대로 혁신적인 방법이 동원됩니다. 식량을 짊어지고 가는 거였죠. 이들은 무려 백일치의 식량을 들고 갔고, 여기에 무기 등 다른 보급품도 메고 가야 했습니다. 사람마다 3석 이상의 무게라 하니... 한 석당 10kg로 따지더라도 어마어마하죠. 이걸 어찌 다 들고 가겠습니까. 병사들은 버리기 시작했고, 버리면 죽이겠다고 하자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들이라고 안 먹으면 죽는다는 걸 왜 몰랐겠습니까. 들고 가다 죽을 것 같으니 그랬겠죠.

이걸 해결할 방법이 둘이나 있긴 했습니다. 첫째는 전통의 약탈이었죠. 전근대에 보급부대가 따라오지 못 한다면 적의 땅에서 돈 주고 사 먹거나 뺏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걸 불가능하게 만들었죠. 고구려는 이미 수도가 두 번이나 털렸던 나라입니다.  백제 공격할 때도 수도로 강공해서 이겼으니,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죠. 35만(혹은 30만 5천) 대군은 고구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막기 힘든 대군이었습니다. 정면승부는 할 수 없었고, 그 힘을 최대한 빼야 했죠. 네, 청야 전술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방법은 그들이 남진하는 사이에 없어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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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디 고구려에서 성을 튼튼히 지키고 들판을 깨끗이 비운 채 우리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그들 스스로가 죽을 곳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을 멸망시키고 아침을 먹겠다."

내호아는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향합니다. 상륙하자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기다렸는데, 저렇게 말 하면서 격파했죠. (저번 편에서 수군이라 했는데 아닙니다. - -a 고구려 수군은 중국의 수륙협공에 별다른 힘이 못 되었죠) 고구려군이 이것가지도 계산하고 유인한 건지, 야전으로 안 되겠으니 작전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이 난 내호아는 4만(혹은 5만)을 이끌고 직접 평양성을 공격하려 합니다. 별동대와 함께 공격하기로 했었고, 주변에서도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지만 무시합니다. 그가 밀고 나가자 고구려군은 싸우는 척 하다가 다시 패합니다. 신이 날 대로 난 내호아는 그 날 밤에 약탈을 허락했죠.



하지만 평양성은 4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외성만 먹어 놓고 마음 놓아 버린 겁니다. 지 딴에는 두 번이나 이겼으니 설마 덤비겠냐 했겠죠. 하지만 고구려군은 병력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 모든 게 다 작전이었으니...

그 날 밤, 고건무는 500의 결사대를 이끌고 적을 기습합니다. 겨우 500이냐 하겠지만 성 내에서 매복한 거였고 방심한 적에겐 이걸로 충분했죠. (물론 북쪽을 방비하느라 그만큼 수도 평양에서도 쓸 병력이 적었다는 건 맞겠습니다만) 내호아의 수군은 정말 탈탈 털려서 달아났고, 배로 돌아간 이후에는 다시 오지 못 합니다. 고구려군도 더 공격하진 않았고 말이죠.

"내호아의 군사가 패하여서 먼저 물러나지 않았다면 평양성의 바깥에 진영을 치고서 우문술 등의 제군과 달려와 응원하면서 호응하여서 살수에서의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자치통감

이 의미는 정말 컸습니다. 만약 이들이 육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면 보급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평양 앞까지 왔다가 바로 돌아가진 않았겠죠. 살수대첩을 있게 한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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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까지 가는 걸 고구려군이 그냥 두지는 않았습니다. 압록강 근처에 있는 오골성에서 뒷치기를 시도했죠. 우중문은 이걸 예측하고 일부러 약한 말들을 배치해서 유인한 후 격파합니다. 이것만 봐도, 아니 애초에 별동대를 맡은 것만 봐도 우중문이나 우문술의 능력은 충분했습니다. 양제가 바보였고 고구려가 더 훌륭히 막아낸 것일 뿐이죠.

압록강까지 오는 데만 해도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고구려의 거물이 나옵니다. 양제가 영양왕 고원과 함께 언급했던, 온다면 반드시 붙잡으라고 했던 대신 을지문덕이었죠.

을지문덕은 항복하겠다고 한 후 돌아갑니다. 전편에서 썼듯이 (그리고 이후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냥 항복이 아니라 왕을 데리고 입조하겠다는 거였겠죠. 그러고 돌아가겠다는 을지문덕, 수군의 내부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저걸 잡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로 말이죠. 우중문은 잡으려 했지만 상서우승(3품?) 유사룡이 말립니다. 사신으로 온 자를 죽이면 안 된다고 말이죠.



이런 걸 보면 수나라의 패인은 대국의 위엄을 지키려는 것도 꽤 큰 걸 알 수 있습니다. 양제부터가 이름이 관대하가 아닐까 싶으니까요. 물론 이 경우는 좀 다르긴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신을 죽이면 안 되죠. 사실 사신으로 그리 큰 거물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이 때 을지문덕을 잡거나 죽였으면 정황이 바뀌었을까도 재밌는 떡밥이죠. 기록이 부족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이 정도로 대담한 행동을 한 걸 보면 애초에 자기가 죽더라도 뒷 계획을 다 짜 놓지 않았을까요?

그 짧은 시간에 을지문덕은 수군의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군량도 떨어지고 지쳤다는 것을 말이죠. 우중문은 뒤늦게야 생각을 바꿔 "의논할 게 더 있다"면서 다시 불렀지만 육지로 간 토끼가 돌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걸로 확실한 방침이 세워집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자그마한 적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소?" - 우중문

우문술은 상황이 이러니 돌아가자고 했지만 우중문은 거부합니다. 그대로 밀고 나갔죠. 을지문덕은 이걸 파악하고 일곱 번을 일부러 져 줍니다. 이렇게 수군은 압록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건너 평양성이 보이는 곳까지 가게 됩니다. 30리, 한국식으로 10리가 4km로 보면 정말 코 앞까지 온 것이었죠.

하지만... 그냥 무작정 달려온 적들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평양성을 공격할 장비가 있었겠습니까. 군량도 없고 수군은 연락도 안 되고 말이죠.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 철수한다면 왕과 함께 입조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자를 통해 시를 하나 보내죠. 네, 그 유명한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입니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 ... 일베 안 합니다.

병법에서 따지는 것이 세 개 있죠. 하늘과 땅, 사람. 천시, 지리, 인화입니다. 하늘을 알고 땅을 알았다면서 칭찬해 주고, 니가 큰 공을 세웠다면서 띄워 준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죠. 정말 반어법의 극한을 보여 준 겁니다. 이런 굴욕을 당하고도 그 말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으니까요. 그나마 저 시와 거짓 항복이 명분을 주긴 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가 고구려 땅에서 뼈를 묻어야 했을 테니까요.

자치통감고이에서는 혁명기라는 책을 인용하며 다른 얘기도 해 줍니다. 고구려군이 성에 항복을 뜻하는 깃발을 꽂고는 5일 후에 지도와 호구 등의 문서를 들고 성문을 열겠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5일이 지난 후에는 싸움을 뜻하는 깃발을 세웠다고 합니다. 10일을 날린 거죠 (...)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배와 양식이 모두 패몰되어 수나라 군사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공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저게 맞다면 그 10일도 수나라를 아예 굶어죽이는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죠.

결국 우중문은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평양 근처까지 오긴 했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고구려군의 역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우문술은 이걸 생각하고 방진을 치면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도망친 게 아니라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천천히 간 것이죠. 이 정도면 그들도 할 만큼 했습니다. 고구려군이 더 잘 했을 뿐이죠. 고구려군은 그런 수군을 사방에서 찌르면서 피해와 피로를 누적시킵니다.

살수, 청천강에서는 이 진형을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을 건너야 했으니까요. 고구려군은 이 때를 노립니다.

"적이 물을 건너서 오면 적이 물 안에 있을 때 맞서지 말고 절반은 건너게 만들고서 치는 게 이롭다." - 손자병법 행군편

살수대첩이 흔히 수공으로 적을 몰살시킨 전투로 그려지는데 그건 어렵습니다. 단기간에 댐을 쌓아서 적을 쓸어버리는 건 지금도 힐들 거니까요. 만화 창천항로에는 하비성 공략전에서 발목이 담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 합니다. 수공은 그렇게 하는 것이죠. 거대한 물에 다 휩쓸려 갈 정도는 필요 없었습니다. 물살이 조금만 빨라져도 물에 빠지거나 움직이는 게 힘들어 집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죠.

수군이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죠. 여기서 수군은 사실상 궤멸당합니다. 남은 이들이 하루만에 압록강까지 도망갔다고 하니 그 후는 그저 도망일 뿐인 걸 알 수 있죠. 물론 그 후에도 계속 공격을 받았을 거고, 요동성까지 겨우 돌아간 이는 불과 2천 7백명이었습니다. 모든 걸 잃고 몸만 돌아간 것이었죠. 그나마 왕안공, 설세웅 등 후방을 맡아 더 큰 피해를 막은 게 보이긴 합니다만 그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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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는 당연히 분노합니다. 우중문 등 패장들은 묶여서 끌려갔고, 직위를 잃고 일반 백성으로 깎입니다. 을지문덕을 보내주자고 한 유사룡은 참수당했구요.

이렇게 2차 여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정말 누구도 예측 못 했을 대승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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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의 요동 싸움은 군대를 일으킨 성대함이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이를 막아내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의 군사를 거의 다 없앨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좌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 김부식

을지문덕은 참 특이한 인물입니다. 살수대첩의 상황을 보면 수나라에서 알 정도의 거물이었는데, 그 출신이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이거야 뭐 이해할 만 한데 더 큰 문제가 있으니, 살수대첩 이후의 상황도 모릅니다. (...) 진짜 살수대첩이 있는 2차 여수전쟁 때 갑툭튀 했다가 바로 사라진 겁니다. 이름도 文德으로 결코 평범한 이름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이렇게 위대하게 지어도 되나 - 그럴 만할 인물이 될 거임 하는 전설도 있더군요)

대패했다고 수나라 역사서(수서)에서 묻었다고 하기에도 출신까지 묻어버리는 건 좀 심하죠. 김부식이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삼국사기 열전의 첫째는 판타지 수준인 김유신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을지문덕입니다. 고구려 중에선 맨 처음인 거죠. 위만 봐도 김부식이 그를 얼마나 대단히 여겼는지 알 수 있죠. (백제 쪽으로 처음 나오는 건 의외로 흑치상지네요) 거기다 김부식은 한국측의 기록이 없다면 중국 걸 복붙했지만, 있으면 한국 걸 우선했습니다. 그가 이른바 [구삼국사]도 참고한 걸 생각하면, 당시 고려에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없는 수준이었다고 봐도 될 겁니다.

희한한 일이죠. 물론 후대에 그에 대한 게 있긴 합니다. 평양 출신이라구요(조선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 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래서 다양한 학설이 나옵니다. 저로서는 그가 아웃라이어(아웃사이더?)로 보는 데 마음이 더 쏠립니다. 그러니까 기록이 없지 않았겠느냐는 거죠. 이에 대한 걸로는 선비족의 [울지]씨 출신이 아니겠냐는 게 있습니다. 이민족 출신이라는 거죠. 여기에 평원왕의 온달과도 엮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보 온달이라고 하는데 진짜 지적장애인이 싸움 잘 한다고 장군이 되었다고 생각하긴 힘들죠. 평원왕이 귀족들을 누르고 고구려의 혼란기를 끝낸 만큼, 온달도 단순 바보가 아닌 평원왕이 아웃라이어들을 끌어들인 대표로 보는 겁니다. 이걸로 보면 온달이 평원왕 죽고 바로 죽령 이북을 되찾겠다면서, 지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되거든요. 평원왕의 비호 아래 성장한 만큼, 확실한 전공을 올리지 못 하면 대접 받을 수 없을 테니까요. 온달 얘기가 길었는데 을지문덕도 이런 경우였다면? 평원왕의 정책이 성공해서 정말 높은 곳까지 오른 용이었다면 하는 거죠.

물론 큰 반론은 있습니다. (어차피 결론 안 나는 문제죠) 을파소에서 볼 수 있듯 을씨는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으니까요. 을지의 지는 존칭어로 보고, 기존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는 거죠.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라의 골품제에 볼 수 있듯 아무리 잘 나가는 신진세력이라도 그 정도의 자리에 오르긴 힘들 거니까요. 이후의 기록들이야 야사에 전설들이니 뭐 제대로 믿을 수가 없구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기록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 수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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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거뒀지만, 고구려에게 긍정적인 상황만은 아니었습니다. 통일 중국의 가공한 힘을 맛 봤으니까요. 이기기 위해 고구려의 꿀땅인 요동부터 평양까지 청야 전술을 써야 했습니다. 복구하기 쉬운 게 아니었죠. 거기다 작전이라 해도 평양성이 한 번 털렸습니다. 인적 피해는 몰라도 물적 피해는 고구려가 그냥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저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가 적의 입성을 허용한 것부터가 이 전쟁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말 해 줍니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 분석해도 마찬가지죠. 북쪽에 병력을 쏟느라 정말 소수의 병력밖에 남지 않아서 그랬다면, 실패했어도 수륙협공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말 해 주죠. 병력은 충분했어도 적 육군과의 합류를 막기 위해, 빨리 섬멸하기 위해서 그랬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에게 있어서도 살추뼈취, 살을 주고 뼈를 취한 전쟁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수나라의 뼈를 깨뜨렸다기엔, 바로 다음 해에 또 쳐들어 옵니다. 물론 전쟁의 피해는 수나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수나라가 자멸하지만, 통일 중국이 그 정도의 힘을 계속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죠.

정말 장난이 아닌 전쟁을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 후의 상황도 정말 장난이 아니었죠. 평양성에서 대승을 거둔 고건무는 영양왕의 동생이고 훗날 영류왕이 됩니다. 전쟁영웅인 그가 당나라에 대해 온건책을 편 걸 보면 이 전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 강경파에 당하지만요.

정말 힘든 전쟁을 이겼지만, 이건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일 뿐이었죠. 정성이 담긴 역사글에 남루한 춫천 박고 갑니다.

허헣 >_<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2~4중으로 보더군요. 아무튼 정말 공들여 쌓은 성인가 봐요. +_+

글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후덜덜하네요 ㅋㅋ

온달이랑 엮으신 것도 재밌네요. ㅋㅋ 이런 사람들을 자기세력으로 끌어들인 평원왕을 둘러싼 정치지형도 궁금해지고요. 을지문덕 정체는 리얼 무엇일런지

평양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네요 +_+
4중이라니 ㄷㄷ

>_<)// 감사합니다~

청야전술은 어쩔 수 없어요 ㅋㅋ 그렇다고 그 방법 말고 다른 게 없었으니...
고구려는 유목이랑은 거리가 좀 있긴 하죠. 기마 내지 약탈민족 출신이긴 했겠지만요. 물론 말갈이나 거란을 아래 두기도 했으니 유목의 성격도 없진 않을 겁니다 "-" 말씀하신 성을 중심으로 한다는 게 상당히 결정적인 차이죠

수나라에 인재가 없었을 리가 없는 거죠 "-"
유사룡 ㅠㅠ... 뭐 말 자체는 맞았지만... 우리한테야 고맙죠

그럴 듯 하지 않나요? ㅋㅋ

감사합니다 >_<~~

>_< 으흐흐 감사합니다~

그렇지요 뭐 ㅠ_ㅠ

이게 시작이라니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유목이라기 보다는 기마민족으로 본다고 하더군요.

진정한 유목민족은 성이 없더군요.

중앙아시아쪽 키르키즈스탄같은 곳은 러시아가 점령하기 전 까지는 도시가 없었더군요.

역시 청야전술은 일회용....ㅋㅋㅋㅋ
고구려는 구성원중 유목민족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을텐데 성을 중심으로 방어 및 카운터를 치는걸 보면 무언가 유목민족과는 다른 느낌적인 필링이 드네염
우리가 알고있는 대표적인 유목민족인 몽골, 여진의 이미지 때문일까염
아니면 유목민족도 과거엔 성을 주로 쌓고 시대가 지나오며 변한것일까염
예나 지금이나 중원의 통일은 한반도에게 큰 위협인것 같습니다.

실리보다는 대의가 훨씬 큰 시대였으니 이해는 갑니다. 근데 바보....ㅋㅋㅋㅋ

와 진짜 흥미진진. 단문진은 대단하군요.

우중문 ㅠㅠ 유사룡 ㅠㅠ 사신은 잡지않는게 맞긴한데 하필결과가..그리고 왕이 따로 말할정도면 잡았어야

아웃라이어썰 재미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수나라 다음에는 당나라가.. ㅠㅠ 통일 중국의 힘이란 정말..

북조선왕국이 거슬리는군요 -_-; 보시다시피 만주가 다 벌판이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산과 강이 참 많죠. 여기에 숲과 밭도 엄청나게 있구요.

뤼순 이외에 기억해둘 곳은 선양입니다. 만주의 중심도시로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죠. 참 여러이름으로 불립니다. 원래는 선양(한국식으로 심양)이었고 후금이 점령해서 만주어 묵던(성경)으로 고칩니다. 청이 중원을 지배한 후에는 펑톈(봉천)이 되었죠. 청이 망한 후에는 군벌 장쭤린(장작림)이 다시 선양으로 고쳤고, 만주국을 세운 후에는 다시 펑톈으로 고치는 등 한족이냐 만주족이냐에 따라 명칭이 계속 바뀝니다.

현재명칭은 선양이지만 그 때는 펑톈(봉천), 묵던 등으로 불렸으니 여기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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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대본영이 설치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들어갑니다. 육군을 이끄는 참모총장은 오야마 이와오, 이후 만주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이끌죠. 해군을 이끄는 군령부 총장은 청일전쟁 때 초대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이토 스케유키였구요.

해군이 서해와 동해에서 제해권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동안 육군은 상륙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말이죠. -_-; 목표는 만주, 한국의 협조가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걸 위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됩니다. 반대하는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면서까지 강행한 것이었죠. 이미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상황에서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러시아 공사야 일본군이 오자 급히 탈출했구요.

뭐 늘 그랬죠. 이 때 나름대로 중앙군으로 친위대 시위대를 만 명 가까이 보유하긴 했지만 (지방군인 진위대는 2만 이하) 편제상 그랬던 거라 정원이 다 차진 않았고, 장비는 좋은 편이었지만 훈련은 부족했습니다. 싸워도 일본군에게 안 됐겠지만 고종도 결사항전할 생각이 없었죠. 이러니 기껏 키운 군대도 아무런 힘을 못 씁니다. 국방보단 황실보호용, 그것도 국내의 반란진압부대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꺼려한 일본이 러일전쟁 동안 군축을 시킵니다. 이게 군대해산으로 이어지게 되죠.

한일의정서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고 한국은 국내에서 일본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 일본의 승인 없이 이에 위배되는 조약을 맺지 말 것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렇게 급히 기본 방침을 정했고, 세부사항을 정하기 위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뜯어먹기 위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대사로 특파됩니다. 고종과 만나서 어르고 달래면서 각종 이권을 뜯어갔죠.

경의선, 경부선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미완성된 철도를 빠르게 건설하게 합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니 우마차를 징발하고, 사람도 짐꾼으로 징발했죠. 일본 해군이 점령한 진해 등 일본군이 주둔할 곳도 내어줘야했구요. 이걸 넘어서 서해 중북부의 어업권부터 황무지 개간권까지 넘겨주게 됩니다. 군사, 외교, 경제 전방위에 대한 침탈이었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주는 거니까 이정도는 협조해라는 걸로 나온 결과였습니다.

+) 이걸 어떻게 할 것인지를 5월에 일본 내에서 정한 게 [대한시설강령]입니다.

8월에는 1차 한일 협약이 맺어집니다.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외국인을 외교 고문으로 하고, 중요한 외교에 대해서는 일본과 먼저 얘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문정치의 시작입니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타 다네타로가 화폐정리사업을 했고, 외교 고문으로 온 미국인 스티븐스는 귀국해 친일발언을 하다가 장인환에게 암살당합니다. 이승만이 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도 유명하죠.

1차가 있으니 당연히 2차도 있죠. 그 2차가 바로 을사조약입니다. 통감부를 설치해 외교권을 빼앗죠.

이후의 비극과는 별개로 이 때 한국도 전시체제가 되면서 큰 고난을 겪습니다. 청일전쟁 때처럼, 평안도가 제일 심했죠. 러시아군은 기병을 위주로 평양 주변까지 내려와서 약탈과 살인을 하고 갔습니다. 일본군이 진격하면서 그건 멈췄지만, 대신 일본군의 지원에 동원되었죠. 사실상 일본군의 군정이 시작됩니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의 뺨에 색깔을 칠해 뭘 수송하는지 분류했다 합니다. 여기에 자신들의 집도 철도를 위해 헐리거나 군인의 주둔을 위해 뺏깁니다.

반일감정에 의한 사보타주도 계속됐습니다. 단순 반일뿐 아니라 저렇게 당해서 한 것도 컸죠. 연락선을 자르거나 철도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이었죠. 일본군은 이걸 강력하게 처벌합니다. 여기까지라면 이해가 가지만 단순 절도도 엄벌했고, 주둔군이 저지르는 범죄도 당연히 있었죠.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 종군기자 잭 런던

+) 잭 런던은 미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로 이 때 종군기자로 와 있었습니다. 한국까로 위처럼 한국은 독립국가로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죠.

일본군이 물자를 사들이면서 물가도 폭등합니다. 생필품을 구하기가 힘들어지게 됐죠. 평양의 재정을 일본군 지원에 쓰느라 이들을 도울 수도 없었구요.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납니다. 일본군은 진남포(현 남포)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을 잔뜩 데려왔구요.

전체적으로 돈을 러시아보다 더 잘 쳐주고 횡포도 덜하긴 한 것 같습니다. 청일전쟁처럼 말이죠. 전쟁특수로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구요. 하지만 일본군의 주둔이 훨씬 길었고, 군표를 남발해 경제를 망치기도 했습니다.

북부지방엔 항일의병도 있었습니다. 간도관리사인 이범윤은 사포대를 조직해 러시아군과 함께 일본군에 싸웠죠. 그 외에도 일본군에 쫓긴 의병들이 북부, 특히 주 전장이 아니었던 함경도에서 싸웠습니다. 러시아는 이들을 규합해 한인의용군을 만들 시도를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습니다. 이후 이들이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구요.

한국 내의 여론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개화파를 중심으로 일본 편을 드는 이들이 있었고, 전쟁 중 만들어진 일진회처럼 확실한 친일세력도 있었죠. 반면 대규모 의병은 아니지만 철도를 공격하는 등 반일 활동도 일어났구요. 아무튼, 한국 전체의 분위기로 본다면 일본에 협조하는 거였습니다.

+) 안중근은 이범윤과 함께 항일을 할 때도 그가 러일전쟁 때 러시아와 함께 싸운 건 틀렸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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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과 함께 육군 사령관도 결정됩니다. 쿠로파트킨이었죠. 전쟁 전부터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작전을 주장했습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만주는 방어하기 너무 넓었고, 병력은 여기저기 퍼져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어디로 향할지도 몰랐죠. 러시아군이 우위에 설 때까지 방어에 집중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후퇴하게 합니다. 쿠로파트킨은 그 범위를 펑톈을 넘어 하얼빈까지도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측의 예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한반도와 랴오둥 반도라는 두 길로 상륙해 옵니다.

한반도에서는 압록강에, 랴오둥에는 다롄 등 상륙이 예상되는 곳에 병력을 배치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방침이 이랬으니 상륙을 막긴 힘들었고, 병력을 한 곳에 집중한다고 뤼순은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방침이 군사적으로 잘 한건지는 쉽게 판단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실패했죠.

2월부터 한국에 일본군의 상륙이 진행됐고, 북으로 향합니다. 3월 말에 평양을 확보하면서 진남포도 상륙지가 됩니다. 이어 랴오둥 반도 상륙도 진행됐죠.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때 이 곳에서 전쟁을 했고, 압록강과 뤼순 등 주요 목표도 그 때와 같았습니다. 이래서 초반의 작전은 그 때와 비슷하게 갑니다.

4월 23일, 4만이 넘는 1군이 압록강에 집결합니다. 러시아군은 2만 5천여 정도로 방어선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긴 방어선에 흩어져 있었고, 방어력도 약했습니다. 일본군은 첩보와 정찰을 통해 방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일본군을 만만하게 보고 이걸 숨기지 않습니다.


+) 일본해 고칠 필요까진 없겠죠?

29일, 일본군은 방어진의 약한 부분을 찔러 도하에 성공했고, 러시아군은 일본의 주공을 파악 못 하다가 포위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기관총의 활약으로 포위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퇴각할 수 있었죠. 여차하면 후퇴한다는 방침 때문이기도 했구요. 이렇게 러시아는 첫 지상전에서 패했고, 일본군은 10년만에 다시 만주로 진격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천여명, 러시아는 2~3천여명이었습니다.


5월 초부터  2군도 랴오둥 반도에서 상륙을 시작합니다. 우선목표는 뤼순과 만주를 끊는 거였죠. 반도의 목 부분을 공격하는 거였습니다. 진저우(금주)의 난산(남산)이었죠. 25일부터 진저우성과 난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고, 다음날에 성을 점령합니다. 이어 아침부터 난산의 고지를 공격합니다. 일본 해군도 함포로 지원했고, 좌측을 공격한 4사단이 진지를 점령하면서 저녁에 러시아군이 후퇴, 점령하게 되었죠. 이렇게 뤼순을 고립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충격받을만한 일이 있었으니...

러시아군의 피해는 천사백여명,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무려 사천여명이었죠. 단 이틀만의 전투로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죠. 난산 공격에서 사용한 포탄은 34600발, 총알은 220만 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청일전쟁 기간 동안 소비한 것과 같은 양을 하루만에 써버린 것이죠.


맥심 기관총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일본이 근대의 힘과 만났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때 쓰인 게 최초의 현대적인 기관총인 맥심 기관총입니다. 이런 기관총으로 무장한 고지를 점령하려 한 것이고, 피해가 클수밖에 없었죠. 무기는 계속 발전했고, 러시아군은 청군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모전은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한편 러시아측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수라 해도 기관총으로 잘 방어된 진지가 하루만에 뚫린 거였으니까요. 러일전쟁사에서는 병력의 차이도 컸지만 포탄부족과 방어를 맡은 포크가 제대로 지휘를 못 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죠. 문제가 또 있었으니 위의 다롄에 있는 물자와 기지를 제대로 파괴하지 못 하고 도망쳐 온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막사부터 화물선, 석탄까지 마음껏 쓸 수 있었죠. 여기에 병력수를 보면 뤼순의 방어병력도 그리 딸리지 않았는데 역공을 생각 못 하고 있었구요.


주전파로 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 할 알렉세예프. 하지만 전쟁에선 영 못합니다. 군사지식이 부족해서 명령도 애매하게 내렸고, 방어 위주였던 쿠로파트킨과 계속 대립합니다. 패배의 책임이 총독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도 클 겁니다. 결국 10월에 잘립니다.

지휘부에서는 총독 알렉세예프와 사령관 쿠로파트킨이 대립합니다. 알렉세예프는 뤼순을 구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쿠로파트킨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입니다. 이에 알렉세에프는 차르의 허락을 받아내서 그걸로 뤼순 구원을 주장합니다. 쿠로파트킨은 러시아군이 일본군과 대등해진 상황에서도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고, 차르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력을 파견합니다. 이에 일본군도 요격하기 위해 북상하죠.


6월 14일, 양군이 만난 곳은 드리시(득리사), 이 이름을 따서 일본은 도쿠리지, 러시아는 텔리수 전투라 부릅니다. 양측의 병력은 각기 3~4만여 정도였지만 러시아군은 원래 계획에 비해 적게 갔고, 특히 대포의 수에서 100문도 안 됐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200문이 넘었죠.

여기서 일본군은 러시아군보다 한 수 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러시아군은 대포를 배치하는 데에도 서툴렀던 반면 일본군은 강력한 포격으로 방어가 덜 된 러시아군에 피해를 주었죠. 여기에 다음날부터 4사단은 우측으로 우회기동해서 포위했고, 기병대도 좌측으로 러시아군의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러시아 기병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구요. 결국 러시아군이 후퇴하면서 이 전투도 일본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천여명, 러시아군은 삼천여명이 넘었습니다.


저 일본 기병여단을 이끈 게 아키야마 요시후루입니다. 진격의 거인의 작가가 존경한다고 해서 우익논란이 일어난 사람이죠. 뭐 군인으로서는 존경할만 합니다. 조선에도 우호적인 사람이었구요. 식민지 조선이겠지만. 얘기하면 너무 길어질테니 나무위키라도 봐 주세요 -a 해군의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그의 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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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항, Port Arthur, 아서왕 할 때 그 아서입니다. 러시아에선 포트 아르투르라 불렀다는군요. 해군항인만큼 우선순위는 해군에 있었고, 육군도 만주의 러시아 주력군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갔죠. 러시아 해군이 숨죽여 있긴 했지만, 일본 해군의 피해도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트 함대가 제 2 태평양 함대가 되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이들이 뤼순의 함대와 합친다면 결과는 끔찍했을 겁니다. 해군은 단독으로 뤼순을 점령할 수 없었고, 전함도 두 척이 기뢰에 당해 4척밖에 없어서 해전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5월이 되면서 육해군은 뤼순 공략을 합의합니다. 육군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것이죠. 2군이 상륙해서 거점을 잡았지만, 이래서 2군의 2개 사단(1, 11)을 중심으로 한 3군이 편성됩니다.


3군의 사령관은 노기 마레스케, 청일전쟁 때 연대장으로 뤼순을 점령했던 이입니다. 은퇴했지만 이 때 다시 등용되었죠. 그의 휘하에 독일 유학파인 이치지 고스케가 참모장으로 임명됩니다. 이들은 6월 초에 상륙했고, 천천히 진격해 갔습니다. 한편 6월 20일에 만주군 총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만주에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었죠.

+) 위의 진저우 공격 중 그의 첫째아들이 전사합니다. 그리고 3군에는 그의 둘째아들도 있었죠.


3군의 진격상황, 그냥 흐름만 봅시다. 이 과정에 있는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는 여러모로 부족했고, 탈환 시도도 계속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일본군에 전투 고지 한번에 수백에서 천이천씩의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죠. 일본군은 요새에 대한 정보 부족 등으로 빠르게 진격하지도 못했구요. 그러는 동안 요새는 강력하게 보강되고 있었죠.

+) 이 과정에서 태평양 함대가 탈출을 시도하는데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요새의 물자는 충분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잘 저지르는 -_-; 지휘권 문제도 일어납니다. 관동군 사령관인 스테셀 중장은 해임됐고, 요새사령관인 스미르노프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서를 숨겼죠. 이런 어이없는 행동으로 명령은 두 군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포병대 지휘관도 둘이었다고 하구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다면 더 오래, 더 잘 막아낼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수밖에요. 그래도 희망은 있었으니, 7사단장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이었습니다.

그는 공병 출신으로 03년 말에 요새에 왔고, 부족한 상황에 대해 한탄했다 합니다. 곧 그가 중심이 되어 요새를 지었고, 개전 후에는 요새의 전 장병이 미친듯이 매달렸습니다. 몇년간 지은 것보다 포위되기까지의 몇달 동안 지은 것이 더 많은 수준이라 합니다. 역시 닥쳐야 하는 게 사람이죠 (...) 그는 요새를 전부 돌아다니면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요새를 만듭니다. 해군의 함포도 받아서 배치하고, 기관총들을 교차사격할 수 있게 효율적으로 배치했죠. 진지는 콘크리트로 방어하고 진지마다 지하로 교통로를 만들었고, 올라오는 길에는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지뢰는 물론이었죠. 장병들을 만나서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도 있지 않았구요. 물론 이러고도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만, 일본군에겐 충분히 재앙이었죠. 요새에 사거리 긴 중포가 부족한 게 아쉽긴 했지만 각 방면을 지키는 보병과 포병의 지휘권을 일체화했고, 좋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 그런데 이 요새 말고는 일본군이 축성 부분에서 잘 한것 같습니다. 쿠로파트킨이 일본군의 공병을 부러워했다고 하네요

요새의 병력은 2개 사단과 방어병력, 해군의 지원병력을 포함해 4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쿠로파트킨의 방침이 어느정도 이해가 가긴 하네요. 요새의 비축식량은 (육류 20일분을 빼면) 종류별로 120~200일정도가 있었다 합니다. 항복할 때 남은 식량을 보면 정말 아껴서 먹은 것 같네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군에 먼저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러시아군은 고립된 상황에서 정말 잘 싸워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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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요새는 29km에 달했는데 그 중 9km가 바다쪽이었습니다. 일본 해군을 막는 역할이었죠. 육지는 동쪽이 8km 정도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5km 정도로 정상에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고, 서쪽은 7km 이하로 취약한 곳이었죠. 원래 방어선을 더 키우려 했지만 안 됐고 전진기지 몇 개만 있었죠. 그 중 하나가 그 유명한 203고지였구요. 원래는 방어선을 더 멀리 할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없었고, 때문에 방어선 외곽에서 시가지는 물론 함대까지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해군이 요구한 것은 서쪽이었습니다. 203고지 등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하면 항구를 제대로 감제(=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3군에서는 논의 끝에 동쪽을 선택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만들게 된 결정이었죠. 서쪽을 거부한 이유는 철도, 도로와 멀어서 보급이 곤란하다는 점, 평지라서 엄폐가 어렵다는 것, 서쪽은 많은 전진기지를 먼저 잡고 요새를 공격해야 하기에 공격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진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 서쪽의 방어력을 너무 강력하게 보았고, 반면 동쪽은 약하다고 보았구요.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양측의 입장 차이로 해군은 함대 공격을 원한반면 육군은 요새 점령이 목표였던 것이죠. 이후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욕을 많이 먹지만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6월 말 대본영은 뤼순 공략을 서두르라고 명령했고, 7월 중순이 되면서 해군도 함대를 공격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노기는 서두르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방어를 살피면서 역습에 대비한 방어진지를 만듭니다. 실제 러시아의 역습이 계속 있었고 다 막아냈죠. 방어의 일등공신 콘트라첸코가 주도했는데 이 점은 비판받는 부분입니다.

그러는동안 추가병력이 도착했고 3군의 규모는 4만 8천여에 이르게 됩니다. 총공격 날짜는 포병의 증원이 완료되는 8월 18일로 잡았죠. (이후 하루 늦춰집니다) 그 전인 7일에 전진기지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3일간의 전투를 통해 다구(대고)산과 샤오구(소고)산을 점령합니다. 여기서도 2천8백여의 피해를 입습니다. 러시아군은 그 절반 정도였죠. 여기에 대포를 설치해 함대에 피해를 주었고 러시아 함대는 다시 탈출을 시도, 황해해전이 일어납니다. 역시 다음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양군의 합의하에 요새의 타국인들이 탈출했고, 일본군의 최후통첩 러시아군이 스테셀은 거부합니다. 절차는 다 끝났으니 이제 싸울 때였습니다. 작전을 세우고 지휘부도 전선 근처로 이동했죠. 전 전선에서 포격을 한 후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공을 속이기 위해 서북쪽의 양동작전도 준비했구요.

"여러분께서는 전쟁을 직접 목격하고자 매우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나 불굴의 돌격이 완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때맞추어 도착하셨습니다."

노기가 종군기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기자들 앞이니 더 센척해야 한 것도 있겠지만, 상황을 꽤나 낙관적으로 보는 걸 알 수 있죠. 네 뭐 한 번 점령했던 곳이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19일, 이틀간 전 전선에 걸쳐 포격이 진행됩니다. 탄약고가 폭발하는 등 요새는 많은 타격을 입었고 21일에 총공격을 시작합니다.

24일까지 진행된 공격으로 일본군은 전사 5017명, 부산 10843명이라는 피해를 입습니다. 말 그대로 한 개 사단이 날아간 것이었죠.

포격을 아무리 한들 철조망을 파괴할 순 없었습니다. 공병이 길을 만들고 철조망을 잘라가면서 진격해야 했죠. 그렇게 올라가면 기관총과 수류탄이 맞이해 줬습니다. 러시아군은 그저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총알을 뿌리면 될 뿐이었죠. 야습을 해도 탐조등, 조명탄 불빛 아래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았습니다. 힘들게 적진 근처까지 진격하면 러시아군도 뛰쳐나왔구요. 죽어라 산을 올라온 쪽과 내려와서 반격하는 쪽, 어느 쪽이 더 힘이 남아있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대체로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던 일본군 첩보부가 어떻게 요새가 지닌 무한한 힘의 근원을 평가하지 못했는지 또 그런 모험적 방법에 대해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일본군은 자신이 파괴하려 했던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못 계산했다."

당시 일본군에 있던 영국의 군사평론가 노리가드는 이렇게 평했다 합니다. 말 그대로였죠. 요새의 방어력을 너무 무시한 거였습니다. 그 결과는 이리 처참했죠. 일본군이 아무것도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양동이었던 서북쪽에서 산을 점령하긴 했고, 주공에서도 점령한 보루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피해에 비할 바가 아니었죠. 이렇게 큰 피해가 나자 공격을 거부하는 병사도 나타났고, 심지어 상관 살해도 일어났습니다. 결국 노기는 공격중단을 명령했구요.

단기간에 요새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빨리 점령해야 했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러니 더 많은 피가 흐르게 되죠.

러시아군의 피해는 전사 500, 부상 4500 정도라고 합니다. 극과 극이었죠. 하지만 2개 사단으로 넓은 전선을 막기는 힘든 것도 명백해졌구요. 이걸 알렉세예프에게 알렸지만 그게 왜? 수준이었죠. 그나마 무력화된 해군이 요새 방어에 동참하면서 병력이 늘긴 했습니다.

이렇게 1차 총공격은 끝이 납니다. 네, 1차라는 것은 그 이후가 계속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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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영화 203고지의 예고편입니다. 극우적인 요소도 (시작부분 빼면) 딱히 없고 꽤나 처절하게 만들었더군요.

http://egloos.zum.com/beholderer/v/789104

요사노 아키코라는 일본의 유명한 시인이 있습니다. 동생이 러일전쟁에 소집되자 "그대여 죽지 말아라" 라는 시를 지었죠. 뤼순을 점령하든 말든 우리가 뭔 상관이냐, 덴노는 전쟁터에 나갔냐 하는 등 상당히 센 내용이고,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시로 다뤄진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비국민 취급도 당했다고 하네요. 정작 이랬던 사람이 중일-태평양 전쟁 때는 종군위문을 가고 개전찬양시를 쓰는 등 반대모습을 보여줍니다. 생각이 바뀐건지 비국민 취급받고 못 살겠다 느낀건지... 착잡한 부분이죠. 아, 그녀의 동생은 살아돌아왔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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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my게시판의 존재를 이제 알았네요. 토비님 감사합니다 :D ~_~ 감사합니다아~~

시간이 없어서 어제 추천하고 조금 전에 읽었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_~ 감사합니다~~

저도 닥추닥추닥

닥추입니다 닥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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